트랜스휴먼
새벽 2시, 폐지 150kg 주워 9000원 벌었다[남기자의 체헐리즘]
'생계 위해 폐지 줍는 불쌍한 할머니·할아버지'라고만 바라봤다면
그 이면에 숨겨진 일의 가치와 진한 삶의 기록들
남형도 기자
2024.09.11 19:51
새벽 3시 25분. 좁다랗고 고요한 서울 중랑구 골목 끝자락.
거기 놓인 안매영 할머니(70)의 폐지 손수레에 '강제 정비 예고 통지서'가 붙어 있었다. 빨간 글씨 경고장엔 이리 적혀 있었다. 알아서 안 치우면 1제곱미터당 10만원씩 부과하겠다고. 고발하면 2년 이하 징역과 2000만원 이하 벌금이라고.
차곡차곡 해체해 접어 쌓은 큰 상자들, 과자나 달걀이 담겼던 작은 상자들. 흰 비닐에 가지런히 모인 맥주와 음료수 캔들. 형형색색의 버린 옷들. 할머니 손수레는 흡사 작은 재활용 정거장처럼 보였다. 쓰레기로 내놓았으나 이들 손을 거쳐 쓰일 거였다.
저 멀리 안매영 할머니의 아담한 그림자가 다가왔다. 또 다른, 작은 손수레에 폐지를 가득 실은 채였다. 딱 봐도 무게가 상당해 보이는데 놀랍도록 빠른 걸음이었다. 할머니를 보며 최준기 할아버지(77)가 말했다.
"아니, 구청서 딱지 붙인 거 봤어? 나 마냥, 리어카를 가져와서 이렇게 채곡채곡 모으고 해야지. 정리해 가면서 하면 이럴 일이 없잖어."
"알았어요, 알았어. 미안해요. 낮에는 갖다 놓을 데가 없어서. 잠깐 사이에 붙였네, 아이고."
안매영 할머니가 숨을 고르며 답했다. 단정하게 묶은 머리, 풀밭을 닮은 옷 배경엔 꽃과 나비가 곱게 새겨졌다. 찰나에 살펴본 손에선 생활의 단단함 같은 게 까맣게 묻어 있었다.
큰 손수레로 작은 골목을 누비긴 힘들고 벅차다고. 이를 골목 한편에 세워두고, 작은 손수레를 잡고 누비며 돌아와 모으는 방식. 그러기엔 가벼운 유아차가 제격이라고 했다. 막상 잡아보니 바퀴가 덜렁거려 제멋대로 움직였다. 그마저도 내공이었다.
조금 늦더라도 정리하며 하라고. 최준기 할아버지는 반복해서 잔소리했다. 겉으로 보기엔 타박이었으나 걱정이 짙게 담겨 있었다.
그리 느꼈던 건 할아버지가 할머니 손수레를 함께 정리해서였다. 그건 놔두고, 이건 모으고, 저건 버리고. 둘의 손발과 대화가 합을 맞추니, 대책 없어 높았던 폐지 더미가 단번에 정리됐다. 도합 43년의 수집 경력이란. 고마워하던 안매영 할머니가 돌연 한숨을 푹 쉬었다.
"이렇게 해도 7000~8000원 밖에 안 나와요. 무게가 170킬로는 될 텐데도."
새벽 2시에 출근했습니다 폐지 줍는 노인의 삶. 출근한 건 '새벽 2시'. 최준기 할아버지가 언제 체험하러 오겠느냐고 묻기에, 평소 일하는 시간에 맞추겠다고 하니 그리 정한 거였다. 아내가 왜 새벽 2시냐고 물었다. 가보면 이유가 있을 거라고 했다. 알람을 맞춰 새벽 1시에 일어나 택시를 탔다.
새벽 1시55분. 중랑구 녹색병원 앞 가로등 아래, 할아버지가 서 있었다. 단정한 백발에 눌러쓴 남색 모자에 노란 조끼. 1948년 겨울에 태어나 20년 넘게 환경미화원 일을 하고 몸이 아파 은퇴했단다. 폐지 수집 일을 한 지는 3년이 좀 넘었다고 했다.
"집에 앉아 있으면 어쩔 거예요. 집에선 하지 말라고 하는데, 취미로 그냥 하는 거지. 중랑천에서 운동 두어 시간 하다가, TV 보다가. 나와서 새벽에 한 번 돌아다니고, 저녁에 한 번 또 돌고. 그뿐이에요."
큰 손수레와 좁은 골목. 한적한 터라 그나마 수월하게 나아갈 때, 새벽엔 그래도 덜 덥다고 느꼈을 때, 왜 새벽 2시에 일하는지 알았다. 밤 장사를 마치고 내놓는 상자들도 많고, 낮엔 수집하는 사람이 많기도 하단다. 이 시간에도 경쟁이 치열했다. 자전거 타고 다니는 할머니도, 손수레를 끄는 할아버지도 벌써 꽤 있었다.
골목을 두리번거리며 상자를 찾던 최준기 할아버지가 말했다.
"아까 꽉 차 있었는데, 늦게 오니까 벌써 다 가져가 버렸어요."
다들 잠든 새벽 2시도 '늦게 온 시간'이라 말할 수 있는 노동의 세계. 남아 있던 잠이 싹 달아나는 기분이었다.
'평균 909번' 허릴 숙여야 하는 일
컴컴한 밤길 사이로 커다란 손수레가 뒤뚱거리며 나아갔다. 그 옆으로 차가 쌩 지나가기도 하고, 주차된 걸 긁을까 조마조마하기도 했다. 여러 불안을 헤치며 우린 멈추고 모으고 다시 걸었다.
최준기 할아버지는 내가 못 보는 걸 봤다. 예컨대 기다란 골목 끝에 놓인, 잘 보이지도 않던 상자 더미 같은 걸. "잠깐만, 여기 있어요." 그리 말하고 걸어갔고, 뒤따라가면 어김없이 거기에 정리되지 않은 쓰레기가 있었다.
뜯지 않고 내놓은 상자들. 상자 안에 비닐, 캔, 종이, 플라스틱. 마구잡이로 뒤섞인 것들. 테이프를 죽 뜯고, 큰 상자는 해체해 쌓고, 작은 상자는 밟아서 압축하고. 캔 등은 따로 분류했다. 좀 전까진 쓰레기였던 것들이 그의 손을 거치고, 손수레에 실리고, 다시 쓰일 가치를 지닌 무언가가 됐다. 날이 선선해졌나 싶었는데 땀이 주룩주룩 났다. 나도 모르게 말했다.
"아우…허리가 꽤 아프네요."
상자 개수만큼, 집을 때, 분해할 때, 그걸 다시 쌓을 때, 상자 안 쓰레기를 주울 때. 매번 무릎과 허릴 썼더니 금세 욱신거렸다. 엄살떨다가, 묵묵히 일하는 할아버지 옆모습을 보고 절로 물어보게 되었다. 허리는 괜찮으시냐고. 할아버지가 이리 답했다.
"허리는 녹색병원에서 CT 찍었는데, 4번하고 5번이 약간 문제가 있대요. 심각한 건 아니니 지켜보자고요."
하루에 몇 번이나 숙이는 걸까. 녹색병원 노동환경연구소에서 평균 78.8세인 폐지 수집 노동자 다섯 명을 분석했다. 노동하는 8시간 동안 허리를 30도 이상 굽힌 횟수가 무려 909.8번에 달했다. 밀고 당기는 동작도 226.8번이었다. 이날 노동 시간이 4시간이었으므로 최소 454번은 허릴 숙였을 거였다.
상자가 잘 분해돼 있었다면, 모여 있었다면, 그런 생각을 속으로 수백 번씩 했다.
'줍는 사람'과 '받는 사람', '주운 걸 훔치는 사람' 통상 팔아야 할 고물상을 기준으로 인근에서 폐지를 수집한다. 치열한 경쟁이었다.
열심히 줍는 방법만 있는 줄 알았는데 아녔다. 과일가게를 지나던 할아버지가 이리 말했다.
"과일 상자처럼 두꺼운 건 무게도 많이 나가서 좋거든요. 특정 노인만 정해두고 주는 경우가 있어요. 예를 들어 청소해주거나, 한 달에 얼마를 주기도 하고요. 상자가 많이 나올 땐 엄청 나오거든. 어떤 사람은 그 앞에 상주해서 그것만 받으려고 해요. 난 그렇게는 잘 안 되더라고."
뷔페 가게 앞을 지나면서도 "여기도 철판이 나와서, 내가 두 번 정도 주웠는데 안 나온다"며 '받는 사람'이 정해진 것 같다고 했다.
커다란 철을 운 좋게 줍기도 했다. 철은 킬로당 100~150원. 상자(60원)보다 더 많이 쳐준다고. 철을 집 안에 들여놓기에, 왜 그러느냐고 물었더니 '훔쳐 가는 사람'도 있다고 했다. 김치 상자에 담긴 맥주캔을 분리하며 들은 얘기라, 코끝이 취한 듯 얼얼했다.
그 무렵 길에서 만난 안매영 할머니도 이리 말했다.
"손수레에 넣어둔 것도 자주 없어졌고, 우리 빌라 안까지 들어와서 다 집어 간 사람도 있어요. 계단까지 올라와서. 깡통이랑, 프라이팬이랑, 배선이랑 묶어둔 것도 다 가져갔잖아요."
40년을 생계 때문에 폐지를 줍고…맘속으로 매일 울었다 안매영 할머니는 가늠하기 힘들 정도로 손이 빨랐다. 모아둔 폐지를 보고, 며칠을 모았느냐고 물었더니 '하루 모은 것'이라고 했다. 놀랍다며 칭찬했더니, 잘 모르겠다며 멋쩍게 웃었다.
새벽 4시가 넘어간 시간. 손수레를 다 정리하고, 무게 중심을 맞춰 세워두었다. 170킬로에서 180킬로는 될 거라고 했다. 손수레를 움직여봤다. 작은 턱도 넘으려다 뒤로 자빠질 것처럼 묵직하게 덮쳐와 놀랐다. 안매영 할머니의 얼굴에 새겨진 굴곡이 새삼 보였다. 자기 얘길 들려주었다.
"30살부터 폐지 수집을 시작했어요. 어디 취직도 못 해서. 애가 둘인데 밥 세 끼 채워주지 못하면 맘이 아프잖아요. 어렸을 땐 애들이 부끄러워했어요. 이거나 하고 다니는데 좋을 자식은 없잖아요. 몸에 손 대면 싫어하면서 털어서, 마음속으로 계속 울었어요. 이 일을 하며 속상한 것도 풀고 위로도 많이 됐어요."
그리 떳떳하게 자식을 다 키웠는데, 최근엔 힘들고 억울한 일에 휘말렸다고. 어느 집 문 앞에 여행 가방이 놓여 있길래, 당연히 버린 건줄 알고 옷 두 개를 수집하려 꺼냈는데, 경찰에 신고돼 '절도죄'가 나왔다고 했다. 순식간에 절도범이 됐고, 경찰에 하소연했으나 재판에 넘겨져 벌금 100만원이 나왔단다(상세 취재 예정).
기초생활수급자인 할머니에게 한 달에 얼마를 버느냐고 물었다. 많아야 20만원이라고 했다. 다섯 달 정도 일해야 버는 돈을 벌금으로 내게 생긴 거였다. 할머니가 평생 떳떳하게 살았는데 억울하다며 울었다. 할아버지가 안타까워하며 말했다.
"우리 같이 일하는 사람들이 그런 경우를 많이 당해요. 돈은 내더라도 가급적 절도 말고 죄명이 바뀌었으면 하는 거지요. 실수로 할 수도 있는 그런 걸로 해서요. 무슨 좋은 말이 있잖아요."
허연 놀이터 조명 아래에서 하염없이 울먹이는 하소연을 듣느라, 모기가 온몸을 물어뜯는 줄도 몰랐다. 새벽 5시30분. 할머니가 말을 마치고 간지러워 벅벅 긁었다.
5000원, 9000원…그리 많이 모았어도 새벽 6시. 고물상 앞엔 손수레가 하나둘씩 줄지어 섰다. 어떤 할아버지는 40분 전에 와서, 인도에 쪼그리고 앉아 기다렸다. 상자와 캔과 유리병과 옷과 철 등. 종류에 따라 가격을 매겨 현금이 지급되었다.
손수레가 커다란 저울로 올라가고, 최준기 할아버지와 안매영 할머니도 들어갔다 나왔다. 잠시 뒤 돌아온 둘의 손에는 하얀 봉투가 쥐어져 있었다. 가격이 그리 매겨진 근거가, 볼펜 손 글씨로 쓰여 있었다. 할아버지는 5000원, 할머니는 9000원을 벌었다. 그 작은 몸으로 180킬로 정도 모았어도 그것밖에 안 나왔다(그것도 값이 더 나가는 걸 함께 모아서 그 정도).
빈 손수레가 홀가분해 보였고, 인사를 나눈 뒤 둘은 홀연히 사라졌다. 생계를 위해, 용돈을 벌기 위해, 새벽을 낮처럼 누비며 당당히 노동하며 얻은 대가.
그 뿌듯함에 대해 80세 김아무개 할머니는 이리 말했다.
"이게… 조금만 한다는 게 잘 안 돼요. 애들이 하지 말라고 (손수레를) 때려 부순다고 해도. 밤에 자려고 드러누우면 다리도 저리고 아프고 하거든요. 근데 이거, 상자에 신경 쓰고 돌아다니면 아프단 걸 잊어버려요. 내가 번 돈하고, 애들이 용돈 준 게 다르거든요. 자기가 사장도 아니고 남의 밑에서 힘들게 번 돈인데 미안하기도 하고."
손주 생일이라고 열심히 모아 5만원을 줬다며 환히 보이던 할머니의 웃음. 할머니 고생해 번 돈인 걸 알아서 아껴 쓰겠다고 했다고.
애들 곧 대학 가면 얼마나 쓰고 싶은 게 많을 거냐며, 좀 더 줄 거라며. 90도로 굽은 등으로 손수레를 밀며, 때론 그에 의지하며, 퇴근하는 그의 뒷모습이 꼿꼿이 선 것보다 더 커 보였다.
'폐지 줍는 노인' 혹은 '자원 재생 노동자' '힘들어서 폐지 줍는 노인'과 '재활용이 힘든 주택가 쓰레기를 켜켜이 모아 자원으로 만드는 노동자'.
가장자리 노동자를 치료하는, 녹색병원 전태일의료센터 건립을 위해 캠페인을 진행 중인 '오늘의 행동 사회적협동조합'의 서경원 대표는 전자와 후자 차이가 이리 크다고 했다.
"약하고 불쌍한 사람이 단순히 소일거리로 하는 시혜적 관점이 아니라, 노동자로 바라본다면요. 이 분들은 폐지 재활용의 60%를 담당하고 있거든요. 기후나 환경 문제를 낫게 만드는 데 일조하고 있으니까요. 노동환경이라 생각하면 당연히 더 좋게 바꿔야 한단 생각이 들죠."
노동환경으로 바라본다면 어떨까. 100킬로에 달하는 폐지를 수집하다, 한 해 평균 6명의 노인이 차에 치여 사망한다. 하루 평균 11시간 20분을 일하며, 12.3킬로미터를 걸어, 월 10만원을 번다. 폐지 수집 어르신이 다치는 직업적 손상 유병률은 일반 인구의 10.4배, 육체 노동자와 비교해도 4.6배 더 높다.
그래서 녹색병원에선 의료비 부담 때문에 치료를 꺼리는 자원재생 어르신들을 무상으로 치료하고 있다. 지난해 6월 중랑구청(구청장 류경기)과 업무협약도 맺었다.
홍금자(가명) 어르신은 여든이 넘도록 아들과 손주를 뒷바라지하며 다 키워냈다. 허리가 너무 아팠지만, 동네 병원에서 겨우 약만 사 먹었었다. 녹색병원에서 무료로 검진도 받고, 허리 부위 시술도 받아 통증이 줄었다. 그는 "마음이 한결 나아졌어요. 고맙습니다"라고 했다.
나아가 녹색병원 노동환경연구소에선 이들의 '운반구'를 개선하는 작업도 하고 있다. 국내 60~80대 남성과 여성의 신체를 분석해, 적정한 손수레 높이와 무게, 바퀴 크기까지 고려해 만든단다. 이를 위해 직접 자원재생 어르신과 동행하며 연구하고 분석했다.
'이어줄'로 상자를 묶어 내놓았다, 우릴 위한 노동이기에 임상혁 녹색병원 원장이 인상 깊은 말을 했다.
"우리가 단순하게 아픈 사람 병만 치료하는 병원이 아니라, 아픈 사회를 치료하자, 이런 거거든요. 그 노인들이 새벽같이 나가서 교통사고를 당하거나 쓰러진다면요. 우리가 힘을 합쳐서 그런 걸 바꿔보면, 정말 아픈 사회를 치유하는 모습이 되겠지요. 그리 좀 더 따뜻하게, 굳건하게 만드는 게 우리 사회에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이를 바꾸는 힘은 '연결'이다. 마구잡이로 버린 쓰레기들을 챙겨 자원으로 만드는 사람. 그리 필요한 노동을 하는 이들과 우리가 동떨어져 있지 않단 것. 둘을 잇는단 의미에서, 서경원 '오늘의행동' 대표는 '이어줄'을 만들었다.
주황색 끈으로 폐지를 묶어 내놓으면, 자원재생 어르신들이 허리를 굽히는 횟수를 현저히 줄일 수 있다고. 근골격계 질환을 줄여 계속해서 일할 수 있게 해 생계를 잇는단 의미도 된다.
서경원 대표가 그 의미에 대해 이리 덧붙였다.
"지금은 상자에 쓰레기를 다 섞어서 버리잖아요. 만약에 자원재생 어르신들이 기후와 환경 문제에 기여하고 있단 걸 생각한다면, 잘 수거해달라고 요청하지 않을까. 그게 어떻게 보면 끈으로 묶어 내보내는 활동이 아닐까란 생각이 들었어요. 단순히 쓰레기를 버리고 줍는 관계가 아니라, 이를 좀 복원했으면 좋겠단 생각이 들었고요."
에필로그(epilogue).
한겨울. 영하 16도에서 17도로 떨어지던 강추위에도 폐지를 주웠단다. 그것도 맨손으로. 장갑을 끼면 수집하는 게 둔하다고 무리했단다.
안매영 할머니는 그 후유증에 시달려 손이 아프다고 했다. 한여름이 다 되도록, 초가을이 될 때까지. 동작을 할 때 맘대로 안 돼 힘들다고 했다.
하루는 그걸 본 아들이 물었다. 엄마 왜 그러냐고. 이리 둘러댔단다.
"다친 거 알면 또 막 뭐라고 하니까, 얘길 못 하겠더라고요. '이상하다 야. 리어카를 너무 끌고 다녀서 그런가 봐.' 그렇게 말했어요. 한 번은요. 리어카 가지러 가려다가, 택시가 언제 왔는지 코앞에 딱 와 있는 거예요. 죽을뻔했지요. 그런 게 있어요, 기자님."
아들이 깨기 전에 얼른 집에 돌아가야 한다며, 안매영 할머니가 길을 서둘렀다.
어느새 빨라진 가을 해는 맑게 떠 있었고, 새벽까지만 해도 집 앞에 쌓였던 쓰레기가 깨끗해져 돌아가는 길이 상쾌하고 좋았다.
거기 놓인 안매영 할머니(70)의 폐지 손수레에 '강제 정비 예고 통지서'가 붙어 있었다. 빨간 글씨 경고장엔 이리 적혀 있었다. 알아서 안 치우면 1제곱미터당 10만원씩 부과하겠다고. 고발하면 2년 이하 징역과 2000만원 이하 벌금이라고.
차곡차곡 해체해 접어 쌓은 큰 상자들, 과자나 달걀이 담겼던 작은 상자들. 흰 비닐에 가지런히 모인 맥주와 음료수 캔들. 형형색색의 버린 옷들. 할머니 손수레는 흡사 작은 재활용 정거장처럼 보였다. 쓰레기로 내놓았으나 이들 손을 거쳐 쓰일 거였다.
저 멀리 안매영 할머니의 아담한 그림자가 다가왔다. 또 다른, 작은 손수레에 폐지를 가득 실은 채였다. 딱 봐도 무게가 상당해 보이는데 놀랍도록 빠른 걸음이었다. 할머니를 보며 최준기 할아버지(77)가 말했다.
"아니, 구청서 딱지 붙인 거 봤어? 나 마냥, 리어카를 가져와서 이렇게 채곡채곡 모으고 해야지. 정리해 가면서 하면 이럴 일이 없잖어."
"알았어요, 알았어. 미안해요. 낮에는 갖다 놓을 데가 없어서. 잠깐 사이에 붙였네, 아이고."
안매영 할머니가 숨을 고르며 답했다. 단정하게 묶은 머리, 풀밭을 닮은 옷 배경엔 꽃과 나비가 곱게 새겨졌다. 찰나에 살펴본 손에선 생활의 단단함 같은 게 까맣게 묻어 있었다.
큰 손수레로 작은 골목을 누비긴 힘들고 벅차다고. 이를 골목 한편에 세워두고, 작은 손수레를 잡고 누비며 돌아와 모으는 방식. 그러기엔 가벼운 유아차가 제격이라고 했다. 막상 잡아보니 바퀴가 덜렁거려 제멋대로 움직였다. 그마저도 내공이었다.
조금 늦더라도 정리하며 하라고. 최준기 할아버지는 반복해서 잔소리했다. 겉으로 보기엔 타박이었으나 걱정이 짙게 담겨 있었다.
그리 느꼈던 건 할아버지가 할머니 손수레를 함께 정리해서였다. 그건 놔두고, 이건 모으고, 저건 버리고. 둘의 손발과 대화가 합을 맞추니, 대책 없어 높았던 폐지 더미가 단번에 정리됐다. 도합 43년의 수집 경력이란. 고마워하던 안매영 할머니가 돌연 한숨을 푹 쉬었다.
"이렇게 해도 7000~8000원 밖에 안 나와요. 무게가 170킬로는 될 텐데도."
새벽 2시에 출근했습니다 폐지 줍는 노인의 삶. 출근한 건 '새벽 2시'. 최준기 할아버지가 언제 체험하러 오겠느냐고 묻기에, 평소 일하는 시간에 맞추겠다고 하니 그리 정한 거였다. 아내가 왜 새벽 2시냐고 물었다. 가보면 이유가 있을 거라고 했다. 알람을 맞춰 새벽 1시에 일어나 택시를 탔다.
새벽 1시55분. 중랑구 녹색병원 앞 가로등 아래, 할아버지가 서 있었다. 단정한 백발에 눌러쓴 남색 모자에 노란 조끼. 1948년 겨울에 태어나 20년 넘게 환경미화원 일을 하고 몸이 아파 은퇴했단다. 폐지 수집 일을 한 지는 3년이 좀 넘었다고 했다.
"집에 앉아 있으면 어쩔 거예요. 집에선 하지 말라고 하는데, 취미로 그냥 하는 거지. 중랑천에서 운동 두어 시간 하다가, TV 보다가. 나와서 새벽에 한 번 돌아다니고, 저녁에 한 번 또 돌고. 그뿐이에요."
큰 손수레와 좁은 골목. 한적한 터라 그나마 수월하게 나아갈 때, 새벽엔 그래도 덜 덥다고 느꼈을 때, 왜 새벽 2시에 일하는지 알았다. 밤 장사를 마치고 내놓는 상자들도 많고, 낮엔 수집하는 사람이 많기도 하단다. 이 시간에도 경쟁이 치열했다. 자전거 타고 다니는 할머니도, 손수레를 끄는 할아버지도 벌써 꽤 있었다.
골목을 두리번거리며 상자를 찾던 최준기 할아버지가 말했다.
"아까 꽉 차 있었는데, 늦게 오니까 벌써 다 가져가 버렸어요."
다들 잠든 새벽 2시도 '늦게 온 시간'이라 말할 수 있는 노동의 세계. 남아 있던 잠이 싹 달아나는 기분이었다.
'평균 909번' 허릴 숙여야 하는 일
컴컴한 밤길 사이로 커다란 손수레가 뒤뚱거리며 나아갔다. 그 옆으로 차가 쌩 지나가기도 하고, 주차된 걸 긁을까 조마조마하기도 했다. 여러 불안을 헤치며 우린 멈추고 모으고 다시 걸었다.
최준기 할아버지는 내가 못 보는 걸 봤다. 예컨대 기다란 골목 끝에 놓인, 잘 보이지도 않던 상자 더미 같은 걸. "잠깐만, 여기 있어요." 그리 말하고 걸어갔고, 뒤따라가면 어김없이 거기에 정리되지 않은 쓰레기가 있었다.
뜯지 않고 내놓은 상자들. 상자 안에 비닐, 캔, 종이, 플라스틱. 마구잡이로 뒤섞인 것들. 테이프를 죽 뜯고, 큰 상자는 해체해 쌓고, 작은 상자는 밟아서 압축하고. 캔 등은 따로 분류했다. 좀 전까진 쓰레기였던 것들이 그의 손을 거치고, 손수레에 실리고, 다시 쓰일 가치를 지닌 무언가가 됐다. 날이 선선해졌나 싶었는데 땀이 주룩주룩 났다. 나도 모르게 말했다.
"아우…허리가 꽤 아프네요."
상자 개수만큼, 집을 때, 분해할 때, 그걸 다시 쌓을 때, 상자 안 쓰레기를 주울 때. 매번 무릎과 허릴 썼더니 금세 욱신거렸다. 엄살떨다가, 묵묵히 일하는 할아버지 옆모습을 보고 절로 물어보게 되었다. 허리는 괜찮으시냐고. 할아버지가 이리 답했다.
"허리는 녹색병원에서 CT 찍었는데, 4번하고 5번이 약간 문제가 있대요. 심각한 건 아니니 지켜보자고요."
하루에 몇 번이나 숙이는 걸까. 녹색병원 노동환경연구소에서 평균 78.8세인 폐지 수집 노동자 다섯 명을 분석했다. 노동하는 8시간 동안 허리를 30도 이상 굽힌 횟수가 무려 909.8번에 달했다. 밀고 당기는 동작도 226.8번이었다. 이날 노동 시간이 4시간이었으므로 최소 454번은 허릴 숙였을 거였다.
상자가 잘 분해돼 있었다면, 모여 있었다면, 그런 생각을 속으로 수백 번씩 했다.
'줍는 사람'과 '받는 사람', '주운 걸 훔치는 사람' 통상 팔아야 할 고물상을 기준으로 인근에서 폐지를 수집한다. 치열한 경쟁이었다.
열심히 줍는 방법만 있는 줄 알았는데 아녔다. 과일가게를 지나던 할아버지가 이리 말했다.
"과일 상자처럼 두꺼운 건 무게도 많이 나가서 좋거든요. 특정 노인만 정해두고 주는 경우가 있어요. 예를 들어 청소해주거나, 한 달에 얼마를 주기도 하고요. 상자가 많이 나올 땐 엄청 나오거든. 어떤 사람은 그 앞에 상주해서 그것만 받으려고 해요. 난 그렇게는 잘 안 되더라고."
뷔페 가게 앞을 지나면서도 "여기도 철판이 나와서, 내가 두 번 정도 주웠는데 안 나온다"며 '받는 사람'이 정해진 것 같다고 했다.
커다란 철을 운 좋게 줍기도 했다. 철은 킬로당 100~150원. 상자(60원)보다 더 많이 쳐준다고. 철을 집 안에 들여놓기에, 왜 그러느냐고 물었더니 '훔쳐 가는 사람'도 있다고 했다. 김치 상자에 담긴 맥주캔을 분리하며 들은 얘기라, 코끝이 취한 듯 얼얼했다.
그 무렵 길에서 만난 안매영 할머니도 이리 말했다.
"손수레에 넣어둔 것도 자주 없어졌고, 우리 빌라 안까지 들어와서 다 집어 간 사람도 있어요. 계단까지 올라와서. 깡통이랑, 프라이팬이랑, 배선이랑 묶어둔 것도 다 가져갔잖아요."
40년을 생계 때문에 폐지를 줍고…맘속으로 매일 울었다 안매영 할머니는 가늠하기 힘들 정도로 손이 빨랐다. 모아둔 폐지를 보고, 며칠을 모았느냐고 물었더니 '하루 모은 것'이라고 했다. 놀랍다며 칭찬했더니, 잘 모르겠다며 멋쩍게 웃었다.
새벽 4시가 넘어간 시간. 손수레를 다 정리하고, 무게 중심을 맞춰 세워두었다. 170킬로에서 180킬로는 될 거라고 했다. 손수레를 움직여봤다. 작은 턱도 넘으려다 뒤로 자빠질 것처럼 묵직하게 덮쳐와 놀랐다. 안매영 할머니의 얼굴에 새겨진 굴곡이 새삼 보였다. 자기 얘길 들려주었다.
"30살부터 폐지 수집을 시작했어요. 어디 취직도 못 해서. 애가 둘인데 밥 세 끼 채워주지 못하면 맘이 아프잖아요. 어렸을 땐 애들이 부끄러워했어요. 이거나 하고 다니는데 좋을 자식은 없잖아요. 몸에 손 대면 싫어하면서 털어서, 마음속으로 계속 울었어요. 이 일을 하며 속상한 것도 풀고 위로도 많이 됐어요."
그리 떳떳하게 자식을 다 키웠는데, 최근엔 힘들고 억울한 일에 휘말렸다고. 어느 집 문 앞에 여행 가방이 놓여 있길래, 당연히 버린 건줄 알고 옷 두 개를 수집하려 꺼냈는데, 경찰에 신고돼 '절도죄'가 나왔다고 했다. 순식간에 절도범이 됐고, 경찰에 하소연했으나 재판에 넘겨져 벌금 100만원이 나왔단다(상세 취재 예정).
기초생활수급자인 할머니에게 한 달에 얼마를 버느냐고 물었다. 많아야 20만원이라고 했다. 다섯 달 정도 일해야 버는 돈을 벌금으로 내게 생긴 거였다. 할머니가 평생 떳떳하게 살았는데 억울하다며 울었다. 할아버지가 안타까워하며 말했다.
"우리 같이 일하는 사람들이 그런 경우를 많이 당해요. 돈은 내더라도 가급적 절도 말고 죄명이 바뀌었으면 하는 거지요. 실수로 할 수도 있는 그런 걸로 해서요. 무슨 좋은 말이 있잖아요."
허연 놀이터 조명 아래에서 하염없이 울먹이는 하소연을 듣느라, 모기가 온몸을 물어뜯는 줄도 몰랐다. 새벽 5시30분. 할머니가 말을 마치고 간지러워 벅벅 긁었다.
5000원, 9000원…그리 많이 모았어도 새벽 6시. 고물상 앞엔 손수레가 하나둘씩 줄지어 섰다. 어떤 할아버지는 40분 전에 와서, 인도에 쪼그리고 앉아 기다렸다. 상자와 캔과 유리병과 옷과 철 등. 종류에 따라 가격을 매겨 현금이 지급되었다.
손수레가 커다란 저울로 올라가고, 최준기 할아버지와 안매영 할머니도 들어갔다 나왔다. 잠시 뒤 돌아온 둘의 손에는 하얀 봉투가 쥐어져 있었다. 가격이 그리 매겨진 근거가, 볼펜 손 글씨로 쓰여 있었다. 할아버지는 5000원, 할머니는 9000원을 벌었다. 그 작은 몸으로 180킬로 정도 모았어도 그것밖에 안 나왔다(그것도 값이 더 나가는 걸 함께 모아서 그 정도).
빈 손수레가 홀가분해 보였고, 인사를 나눈 뒤 둘은 홀연히 사라졌다. 생계를 위해, 용돈을 벌기 위해, 새벽을 낮처럼 누비며 당당히 노동하며 얻은 대가.
그 뿌듯함에 대해 80세 김아무개 할머니는 이리 말했다.
"이게… 조금만 한다는 게 잘 안 돼요. 애들이 하지 말라고 (손수레를) 때려 부순다고 해도. 밤에 자려고 드러누우면 다리도 저리고 아프고 하거든요. 근데 이거, 상자에 신경 쓰고 돌아다니면 아프단 걸 잊어버려요. 내가 번 돈하고, 애들이 용돈 준 게 다르거든요. 자기가 사장도 아니고 남의 밑에서 힘들게 번 돈인데 미안하기도 하고."
손주 생일이라고 열심히 모아 5만원을 줬다며 환히 보이던 할머니의 웃음. 할머니 고생해 번 돈인 걸 알아서 아껴 쓰겠다고 했다고.
애들 곧 대학 가면 얼마나 쓰고 싶은 게 많을 거냐며, 좀 더 줄 거라며. 90도로 굽은 등으로 손수레를 밀며, 때론 그에 의지하며, 퇴근하는 그의 뒷모습이 꼿꼿이 선 것보다 더 커 보였다.
'폐지 줍는 노인' 혹은 '자원 재생 노동자' '힘들어서 폐지 줍는 노인'과 '재활용이 힘든 주택가 쓰레기를 켜켜이 모아 자원으로 만드는 노동자'.
가장자리 노동자를 치료하는, 녹색병원 전태일의료센터 건립을 위해 캠페인을 진행 중인 '오늘의 행동 사회적협동조합'의 서경원 대표는 전자와 후자 차이가 이리 크다고 했다.
"약하고 불쌍한 사람이 단순히 소일거리로 하는 시혜적 관점이 아니라, 노동자로 바라본다면요. 이 분들은 폐지 재활용의 60%를 담당하고 있거든요. 기후나 환경 문제를 낫게 만드는 데 일조하고 있으니까요. 노동환경이라 생각하면 당연히 더 좋게 바꿔야 한단 생각이 들죠."
노동환경으로 바라본다면 어떨까. 100킬로에 달하는 폐지를 수집하다, 한 해 평균 6명의 노인이 차에 치여 사망한다. 하루 평균 11시간 20분을 일하며, 12.3킬로미터를 걸어, 월 10만원을 번다. 폐지 수집 어르신이 다치는 직업적 손상 유병률은 일반 인구의 10.4배, 육체 노동자와 비교해도 4.6배 더 높다.
그래서 녹색병원에선 의료비 부담 때문에 치료를 꺼리는 자원재생 어르신들을 무상으로 치료하고 있다. 지난해 6월 중랑구청(구청장 류경기)과 업무협약도 맺었다.
홍금자(가명) 어르신은 여든이 넘도록 아들과 손주를 뒷바라지하며 다 키워냈다. 허리가 너무 아팠지만, 동네 병원에서 겨우 약만 사 먹었었다. 녹색병원에서 무료로 검진도 받고, 허리 부위 시술도 받아 통증이 줄었다. 그는 "마음이 한결 나아졌어요. 고맙습니다"라고 했다.
나아가 녹색병원 노동환경연구소에선 이들의 '운반구'를 개선하는 작업도 하고 있다. 국내 60~80대 남성과 여성의 신체를 분석해, 적정한 손수레 높이와 무게, 바퀴 크기까지 고려해 만든단다. 이를 위해 직접 자원재생 어르신과 동행하며 연구하고 분석했다.
'이어줄'로 상자를 묶어 내놓았다, 우릴 위한 노동이기에 임상혁 녹색병원 원장이 인상 깊은 말을 했다.
"우리가 단순하게 아픈 사람 병만 치료하는 병원이 아니라, 아픈 사회를 치료하자, 이런 거거든요. 그 노인들이 새벽같이 나가서 교통사고를 당하거나 쓰러진다면요. 우리가 힘을 합쳐서 그런 걸 바꿔보면, 정말 아픈 사회를 치유하는 모습이 되겠지요. 그리 좀 더 따뜻하게, 굳건하게 만드는 게 우리 사회에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이를 바꾸는 힘은 '연결'이다. 마구잡이로 버린 쓰레기들을 챙겨 자원으로 만드는 사람. 그리 필요한 노동을 하는 이들과 우리가 동떨어져 있지 않단 것. 둘을 잇는단 의미에서, 서경원 '오늘의행동' 대표는 '이어줄'을 만들었다.
주황색 끈으로 폐지를 묶어 내놓으면, 자원재생 어르신들이 허리를 굽히는 횟수를 현저히 줄일 수 있다고. 근골격계 질환을 줄여 계속해서 일할 수 있게 해 생계를 잇는단 의미도 된다.
서경원 대표가 그 의미에 대해 이리 덧붙였다.
"지금은 상자에 쓰레기를 다 섞어서 버리잖아요. 만약에 자원재생 어르신들이 기후와 환경 문제에 기여하고 있단 걸 생각한다면, 잘 수거해달라고 요청하지 않을까. 그게 어떻게 보면 끈으로 묶어 내보내는 활동이 아닐까란 생각이 들었어요. 단순히 쓰레기를 버리고 줍는 관계가 아니라, 이를 좀 복원했으면 좋겠단 생각이 들었고요."
에필로그(epilogue).
한겨울. 영하 16도에서 17도로 떨어지던 강추위에도 폐지를 주웠단다. 그것도 맨손으로. 장갑을 끼면 수집하는 게 둔하다고 무리했단다.
안매영 할머니는 그 후유증에 시달려 손이 아프다고 했다. 한여름이 다 되도록, 초가을이 될 때까지. 동작을 할 때 맘대로 안 돼 힘들다고 했다.
하루는 그걸 본 아들이 물었다. 엄마 왜 그러냐고. 이리 둘러댔단다.
"다친 거 알면 또 막 뭐라고 하니까, 얘길 못 하겠더라고요. '이상하다 야. 리어카를 너무 끌고 다녀서 그런가 봐.' 그렇게 말했어요. 한 번은요. 리어카 가지러 가려다가, 택시가 언제 왔는지 코앞에 딱 와 있는 거예요. 죽을뻔했지요. 그런 게 있어요, 기자님."
아들이 깨기 전에 얼른 집에 돌아가야 한다며, 안매영 할머니가 길을 서둘렀다.
어느새 빨라진 가을 해는 맑게 떠 있었고, 새벽까지만 해도 집 앞에 쌓였던 쓰레기가 깨끗해져 돌아가는 길이 상쾌하고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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