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수의 휴리스틱스

삼성 창업주가 남긴 마지막 질문…"부자는 나쁜 사람인가"

[i-로드]<78>당신은 어떤 부자가 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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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임종철 디자인기자

삼성 창업주 이병철 회장은 암 투병 중인 1987년 어느 가을날 잘 알고 지내던 카톨릭 신부에게 24가지의 물음이 담긴 다섯 페이지 분량의 질문지를 건넸다.

그런데 이 회장은 안타깝게도 대답을 듣지 못한 채 한 달 후 세상을 떠났고 그 물음들은 그대로 묻혀 버렸다. 그렇게 사반세기가 지난 후, 이 회장이 남긴 마지막 물음들은 '잊혀진 질문'(차동엽 저, 2012)이란 책을 통해 마침내 세상의 빛을 보게 됐다.

이 물음들은 "신(神)의 존재를 어떻게 증명할 수 있나?", "신은 인간에게 왜 고통과 불행과 죽음을 주었는가?", "영혼이란 무엇인가?", "인간이 죽은 후에 천국이나 지옥으로 간다는 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나?", "종말은 언제 오는가?" 등등 죽음에 직면한 인간이라면 응당 의문을 가질 수 있는 종교적인 물음들이다.

그런데 그 가운데 유독 이병철 회장이기에 더 절박하게 들리는 물음이 하나 있다. 바로 돈에 대한 물음이다.

이병철 회장: 성경에 부자(富者)가 천국에 가는 것을 약대(駱駝)가 바늘 구멍에 들어가는 것에 비유했는데, 부자는 악인(惡人)이란 말인가?

이 물음은 성경에 나오는 부자 청년에 대한 다음과 같은 예수님 말씀에서 비롯됐다.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도다"(마가복음 10:23), "낙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마가복음 10:25)

이 회장은 당시 대한민국 최고의 부자였고, 그래서 죽음을 앞두고 그 누구보다도 절박한 심정으로 자신이 천국에 들어가기 어려운지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여기서 이 회장의 마지막 물음을 이야기하는 이유는 '부자가 천국에 들어갈 수 있을까?'를 논의하고자 함이 아니다. 이것은 영적 지도자에게 답변을 들어야 하는 물음이지 재테크 칼럼에서 다룰 주제는 아니다. 여기서 진짜 얘기하고 싶은 것은 세속적인 주제인 '부자' 이야기다.

이 회장이 죽음에 직면해서 던진 "부자는 악인인가?"라는 물음은 비단 이 회장과 같은 부호들만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다. 만약 '나는 부자가 아니어서 해당이 안 돼'라고 생각한다면 착각이다. 부자는 상대적인 개념으로, 예컨대 이웃에 나보다 궁핍한 사람이 산다면 나는 부자에 속하게 되는 것이다.

실제로 한국인이 생각하는 부자의 기준은 천차만별이다. 한국에서 몇 억 정도의 돈을 가지고 있어야 부자라 부를 수 있을까? 10억원, 100억원? 2019년 한국갤럽이 전국 성인 남녀 1003명에게 물은 결과, '10억원'이 30%로 가장 많았고 그 다음은 '20억원' 15%, '30억원' 9%, '50억원' 9%, '100억원' 7%, '5억원' 7%, '2억원' 2%, '1억원' 1% 순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조사 결과는 사람마다 부자의 기준이 얼마나 다른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그리고 인생을 돈벌이에만 전념하는 사람들, 머릿속에 온통 돈밖에 생각이 없는 사람들, 돈만을 위하여 일하는 사람들은 이미 정신적으로 '부자' 축에 속하는 사람이다. 따라서 이들도 '부자는 악인인가?'라는 물음에서 자유롭지 않다. 사실 부자 열풍이 불면서 부자가 되는 것을 지상 최고의 목표로 너도나도 부자가 되기를 꿈꾸는 요즘 세상에서 모든 국민이 '잠재적 부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모든 사람이 부자가 되기 위해 한 방향으로 나아가지만 궁극적으로 '어떤 부자'가 될 것인지는 별다른 고민을 하지 않는다는 게 진짜 문제다. 이러한 우리의 모습은 마치 트리나 폴러스(Trina Paulus)의 우화소설 '꽃들에게 희망을'(Hopes for the Flowers)에서 하늘 높이 치솟은 커다란 기둥 꼭대기에 오르는 애벌레의 모습과 같다. 기둥 꼭대기는 구름에 가려 그 위에 무엇이 있는지 보이지 않는데, 애벌레들은 한결같이 꼭대기에 오르면 뭔가 멋진 게 있을 거라 막연히 생각하고 꿈틀거리며 서로 밟고 올라간다.

인간이라는 애벌레는 부자라는 기둥 꼭대기에 오르기 위해 끊임없이 다른 애벌레들을 딛고 올라간다. 다른 애벌레들은 자신이 밟고 올라서야 할 장애물, 혹은 자신을 위협하는 존재들일 뿐이다.

하지만 이 회장이 마지막에 남긴 "부자는 악인인가?"의 물음은 궁극적으로 꼭대기 위의 부자의 모습에 대한 물음으로, "선한 부자도 악인인가?"라는 물음이 내재된 것이다. 예수님이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 어렵다고 말씀하셨을 때 선한 부자와 악한 부자를 구분하지 않고 모든 부자를 싸잡아 지칭하셨을까? 이에 대해 모든 영적 지도자는 부자 중에는 선인도 있고 악인도 있다며 이 둘은 분명히 구분해야 한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즉 부자도 부자 나름이란 말이다.

예컨대 '잊혀진 질문'이란 책을 통해 이병철 회장이 남긴 마지막 물음들에 답을 제시했던 차동엽 신부는 부자가 선인 축에 속할 것이냐 악인 축에 속할 것이냐는 그의 선택에 달려 있다고 말했다.

황상민 전 연세대 심리학 교수도 '한국인의 심리코드'(2002)란 제목의 책에서 한국 부자를 6가지 유형으로 재밌게 분류한 바 있다. 이들은 △배고픈 부자 △철없는 부자 △품격 부자 △보헤미안 부자 △존경받는 부자 △나쁜 부자 등으로, 이 가운데 어떤 유형의 부자가 될 것이냐는 전적으로 자신의 선택에 달려 있다.


'부자가 되는 법'은 경제전문가에게 들으면 된다. 그러나 기둥 꼭대기 너머 궁극적으로 '어떤 부자'가 될 것이냐는 나 자신이 고민하고 스스로 선택해야 한다. 이 회장이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남긴 물음에도 그런 고뇌가 담겨 있다. 존경받는 부자가 될 것이냐 탐욕에 사로잡힌 악인의 꼬리표가 따라다니는 부자가 될 것이냐는 우리 자신의 선택에 달려 있다.

이 회장이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던진 물음은 '돈만 있으면 다 된다'는 가치관으로 무장한 채 맹목적으로 부자라는 기둥 꼭대기에 오르는 세속적인 인간에게 돈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자기 존재의 의미를 발견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이 회장이 남긴 물음은 '너'와 '나' '우리' 모두의 물음이다.

*본 칼럼은 차동엽 신부의 저서 『잊혀진 질문』(개정판 2020, 위즈앤비즈)을 참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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