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M 칼럼

'중국 최대 리스크는 시진핑 본인'[PADO]

편집자주|세계의 주도권을 두고 미국과 중국이 다투고 있는 가운데 이것이 우리나라는 물론이고 전세계에 미칠 영향에 대한 우려가 큽니다. 지난 반세기동안 개혁·개방을 추진하며 전지구적 자유시장경제 발달에 기여했던 중국의 갑작스런 태세 전환의 원인을 두고 혹자는 중국 정치경제 체제가 본질적으로 자유시장경제에 적대적일 수 밖에 없다고 지적합니다. 한편으로는 중국의 최고지도자 시진핑 개인의 성격을 지적하는 이도 있습니다. 미국으로 망명한 중국 지식인 차이샤(蔡霞)도 이런 관점인데 작년 10월 시진핑의 3연임을 확정지은 당 대회를 앞두고 포린어페어스(Foreign Affairs) 2022년 9·10월호에 기고한 글을 요약 소개합니다. 중국공산당의 최고 교육기관에서 오래 근무한 경험 덕분에 필자는 시진핑에 대해 잘 알려지지 않았던 이야기를 많이 들려줍니다. 이번주 PADO는 중국에 대한 각기 다른 두 가지 시각을 함께 소개해 독자가 중국에 대한 보다 균형 잡힌 시각을 가질 수 있게 도와드리고자 합니다.


(베이징 AFP=뉴스1) 우동명 기자 =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16일 (현지시간)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열린 제20차 중국 공산당 전국대표대회(당 대회) 개막식에 도착을 하고 있다. ⓒ AFP=뉴스1 Copyright (C) 뉴스1.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겉보기에 시진핑은 여전히 자신만만해 보인다. 2021년 1월 연설에서 그는 중국이 "전쟁이 일어나면 반드시 승리한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무대 뒤에서는 그의 권력에 문제를 제기하는 목소리가 그 어느때보다 높다. 시진핑은 중국의 오랜 집단지도체제 전통을 폐기하고 마오쩌둥 시대를 떠올리게 하는 개인숭배 분위기를 만들어 냄으로써 많은 당내 인사들을 분노케 했다. 심지어 지지자들조차 일련의 정책실패로 그에게 실망했다. 시진핑은 경제개혁을 거꾸로 돌리고 코로나19에 무능하게 대처함으로써 '보통 사람들의 영웅' 이미지를 망가뜨렸다. 겉으로 드러나진 않지만 공산당 엘리트들 사이에는 불만이 고조되고 있다.

나는 오랫동안 중국공산당의 궁정 내부 투쟁을 가까이에서 관찰할 기회가 있었다. 공산당 중앙당교(中央黨校)에서 교직을 맡은 15년 동안, 나는 중국의 당정(黨政) 관료제에서 일하는 중국공산당 고위간부들 수천 명의 교육훈련을 도왔다. 재임 기간 동안 나는 당건(黨建) 문제에 대해 중국공산당 최고지도부의 자문에 응했고 2012년 퇴임 후에도 계속 조언했다. 그러나 2020년, 시진핑을 비판한 후 나는 당에서 제명되었다. 퇴직금 혜택도 박탈되었고 신변이 위험하다는 경고를 받았다. 나는 지금 미국에서 망명중이지만 중국내 여러 인사들과 연락을 유지하고 있다.

금년 가을 중국공산당 제20차 당대회에서 시진핑은 세 번째의 5년 임기를 부여받게 될 것이다. 일부 당내 엘리트들이 시진핑에 대해 점점 불만을 갖고 있어 그의 연임이 아무런 논란도 없이 확정되진 않겠지만 시진핑이 3연임에 성공할 가능성은 매우 높다. 하지만 그의 성공은 미래에 더 많은 혼란을 낳게 될 것이다. 시진핑은 유례없는 임기연장을 통해 대내적으로는 통제를 더욱 강화하고 대외적으로는 자신의 야심을 더욱 높일 것이다. 시진핑의 통치방식이 점점 극단적이 되면서 그가 불을 지핀 당내 투쟁과 분노는 더욱 격렬해질 것이며, 당내 각 파벌 간 경쟁은 그 어느 때보다 치열하고 복잡하고 포악해질 것이다.

중국공산당 체제의 특징 하나는 인맥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한 사람이 당내에서 승진하려면 실력이나 이념만큼이나 가문의 평판, 당내 파벌 등 인적 관계가 중요하다.

의심할 여지없이 시진핑의 경력도 마찬가지다. 중국의 선전기관과 많은 서양 분석가들이 시진핑이 실력으로 승진했다고 이야기하고 있지만, 시진핑은 자신의 아버지인 시중쉰(習仲勳)의 인맥으로부터 많은 혜택을 받았다. 시중쉰은 흠잡을 데 없는 혁명가 자격을 갖춘 중국공산당 지도자로서 마오쩌둥 시대에 잠시 선전부장을 역임했다. 1980년대 초, 시진핑이 허베이성 북부에서 어느 현의 당서기를 맡고 있을 때 그의 모친은 허베이성 당서기 가오양(高揚)에게 시진핑의 경력을 잘 돌봐달라고 편지를 쓰기도 했다. 하지만 가오양은 허베이성 정치국 상무위원회에서 이 편지의 내용을 공개해버렸다. 편지의 공개는 시중쉰 가문을 매우 난처하게 만들었는데 당 간부들의 특권 추구를 규제하는 공산당의 신설 규정을 위반한 것이 되었기 때문이다. (시진핑은 이 사건을 잊지 않았다. 2009년에 가오양이 세상을 떠났을 때, 그는 장례식 참석을 직접적으로 거절했다. 둘 다 중앙당교 교장을 맡았기 때문에 이러한 행동은 관습을 위반한 것이었다.) 이렇게 인맥을 이용하려다 발각될 경우 다른 일반적 간부들은 경력이 훼손되었겠지만 시진핑은 자신의 인맥의 힘으로 극복할 수 있었다. 푸젠성 당서기의 부친이 시진핑의 부친과 오랜 친구였기 때문에 두 가문은 시진핑이 푸젠성으로 재배치되도록 힘을 모았다. 이러한 인사이동은 매우 드문 일이었다.

하지만 시진핑의 앞길은 여전히 막막했다. 1988년, 지방선거의 부시장 경선에서 낙선하게 되자 그는 지구(地區) 당서기로 승진했다. 그는 그 자리에서도 평범한 직무능력을 보여 경력이 지지부진했다. 중국공산당에서 지구·청(地廳)급에서 성·부(省部)급으로 올라가는 것은 중요한 "관문"인데 시진핑은 오랫동안 이 관문을 통과하지 못했다. 여기서 시씨 가문의 인맥이 다시 개입했다. 1992년, 시진핑의 모친이 푸젠성 신임 당서기 자칭린(賈慶林)에게 간청했고 시진핑은 성급으로 발령났다. 그때부터 그의 경력은 날개를 달았다.

하급 간부들은 다들 잘 알고 있을텐데, 중국공산당 안에서 관직의 계단을 오르려면 자기를 이끌어줄 높은 사람이 있어야 한다. 이것은 시진핑에게 상당히 쉬운 일이었다. 많은 당 지도자들이 그의 부친을 존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시진핑의 최초이자 가장 중요한 멘토인 겅뱌오(耿彪)는 고위 외교관이자 장교로 시진핑의 부친 밑에서 일했던 적이 있다. 1979년, 겅뱌오는 젊은 시진핑을 자신의 비서로 임명했다. 시진핑은 정치경력 초기에 이런 보살핌이 필요했고, 향후 수십년간 연쇄적인 효과가 생겼다. 중국공산당 고위간부들은 각자 자신의 '계보'(系譜), 즉 당 내부인사들의 표현을 빌자면 "은비"(恩庇) 집단("누구누구 라인")를 가지고 있는데 사실상 중국공산당 내부의 파벌이다. 사실 중국공산당 내부의 이념과 정책 논쟁으로 표현되는 분쟁은 속내를 들여다보면 단순히 '라인들' 사이의 권력투쟁일 뿐인 경우가 많다. 이러한 하나의 시스템은 사적인 충성관계로 얽히며, 만약 누군가의 후원자("?山")가 권력을 잃으면 결과적으로 그는 공직사회에서 고아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바깥에 있는 사람들은 중국공산당을 정당보다는 마피아 조직으로 보는 것이 이해하는데 더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당의 최고 지도자는 마피아의 보스이며 그 밑에는 보스의 의형제 그룹, 즉 상무위원회가 있다. 상무위원들은 관례에 따라 권력을 분할하고 각자의 영역인 외교정책, 경제, 인사, 반부패 등을 책임진다. 그들은 마피아 보스의 자문위원회 멤버로서 '큰 형님'(보스)에게 봉사해야 하며, 그들은 각자 책임지는 분야에 대해 '큰 형님'에게 조언해야 한다. 상무위원회 바깥에는 정치국원 18명이 더 있는데 이들은 상무위원 후보다. 이들은 마피아의 지역보스로서 인지된 각종 위험들을 제거하라는 시진핑의 지시를 관철하는데 보스에게서 점수를 따고 싶어서다. 그들의 지위는 곧 특권이다. 그들은 눈치껏 타인의 재산과 기업을 몰수해 부를 축적한다. 이에 대해 아무런 처벌도 받지않는다. 마피아와 마찬가지로 중국공산당은 뇌물, 협박, 심지어 폭력을 비롯한 직접적인 수단으로 원하는 것을 얻는데 익숙하다.

시진핑이 집권했을 때 서방에서는 그를 중국의 고르바초프라고 칭찬했다. 심지어 일부는 시진핑이 고르바초프처럼 급진적인 개혁을 단행해 경제 국가 통제를 해체하고 정치제도를 민주화시킬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물론 이것은 환상임이 드러났다. 시진핑은 마오쩌둥의 충실한 학생으로서 마오쩌둥처럼 역사에 자신의 흔적을 남기고자 절대권력을 확립하기 시작했다. 이전의 개혁들이 당의 지도자에 대해 진정한 견제와 균형을 잡아주는 데 실패했기에 시진핑은 절대권력 확립에 성공할 수 있었다. 이제 중국은, 마치 마오쩌둥 시대로 돌아온 듯 원맨쇼를 다시 시작하고 있다.

시진핑의 권력 공고화 행보 중 하나는 그가 '이념적 위기'라고 일컫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었다. 시진핑은 인터넷 때문에 중국공산당이 인민사상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하게 되어 당의 생존 자체가 위협받고 있다고 말했다. 그래서 시진핑은 블로거들과 온라인 활동가들을 진압하고, 반대 목소리를 검열하고, 중국의 '인터넷 만리장성'을 강화하고, 외국 웹사이트에 대한 접근을 제한했다. 그 결과 새로 태어나고 있던 중국의 시민사회가 죽어버렸고 시진핑을 견제할 여론이 사라졌다.

일반적으로 하나의 정치체제가 지도자 한 명을 중심으로 움직일수록, 지도자의 결함과 성격이 더욱 중요해진다. 시진핑의 경우 과민, 고집, 독재가 그의 성격이다.

사실 시진핑의 이러한 성격은 그가 집권하기 전부터 드러났다. 2008년에 시진핑은 중앙당교 교장이 되었고 당시 나는 그곳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다. 이듬해 교직원 회의에서 중앙당교의 부교장이 시진핑이 교원들에게 내린 경고를 전했다. "누군가 공산당의 밥을 먹으면서 공산당의 가마솥을 부숴버리는 일은 절대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즉, 공산당의 녹을 받으면서 몰래 공산당 제도를 비판하는 일에 경고한 것이다. 중국이라는 국가를 먹여 살리는 것이 납세자들이 아니라 공산당이라는 시진핑의 말도 안 되는 생각에 화가 난 나머지 나는 그 자리에서 쏘아붙였다. "그 공산당은 누구의 밥을 먹나요? 공산당은 인민의 밥을 먹으면서도 매일같이 인민의 가마솥을 부수고 있죠." 아무도 나를 고발하지 않았다. 내 동료 교원들도 내 말에 동의했던 것이다.

시진핑은 권력을 잡자 더 이상 비판을 용납할 수 없었다. 시진핑은 상무위원회와 정치국 회의에서 정책을 논의하지 않고 종종 장황한 연설만 할 뿐이었다. 공식 자료에 따르면 2012년 11월부터 2022년 2월까지 시진핑은 80회의 정치국 '집단학습' 모임을 소집했고, 이 모임에서 '학습'의 특정 주제에 대해 장황한 연설을 했다. 그는 자신의 모양새를 해칠 것 같은 그 어떤 아래로부터의 제안도 거부했다. 왕치산(시진핑의 핵심측근 중 한명으로 시진핑의 첫 주석임기때 상무위원으로 취임)의 친구에 따르면, 한번은 왕치산이 시진핑에게 시진핑이 당원들에게 요구한 "8항 규정"을 개명해 당내의 정식 제도로 채택할 것을 건의했다. 이런 아첨성의 건의도 시진핑은 자신에 대한 모욕으로 받아들였다. 이 규정은 원래 시진핑 자신의 아이디어가 아니었던 것이다. 시진핑은 그 자리에서 왕치산을 꾸짖었다.

시진핑은 '마이크로 매니저'이기도 하다. 많은 전문가들이 지적했듯이, 그는 '모든 것의 의장'처럼 행동한다. 예를 들어 2014년 그는 환경보호 문제에 대해 17번의 지시를 내렸다. 이렇게 크고 작음을 가리지 않는 간섭은 명백히 편집적이다. 덩샤오핑, 장쩌민, 후진타오 모두 중국과 같은 광활한 나라를 관리하려면 반드시 각 지방의 복잡성을 고려해야 한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각급 간부들에게 당 중앙의 지시를 따라야 하지만 실제 현장의 상황에 따라 조정을 할 줄 알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러한 유연성이 경제발전에 매우 중요했다. 지방 관리에게 혁신의 공간을 제공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진핑은 자신의 지시를 한 글자도 틀리지 않게 관철시키라고 요구했다. 나는 어느 현당서기의 경우를 알고 있는데, 그는 2014년에 중앙의 새 "8항 규정"에 대한 구체적인 집행규칙을 만들면서 현지 사정에 맞춰 연회(宴會)에 대해 예외를 두려고 했다. 자신의 지역은 외국 투자가들을 대접할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진핑은 이 혁신적 시도를 알고 크게 화를 내며 이 현당서기가 "당 중앙을 비판했다"고 질책했다. 이는 심각한 사건이 되어 나중에 당 기율조례에 기입되었고 그 현당서기는 출당조치 당했다.

중국공산당에는 마오쩌둥 시대 이래 이어져온 오랜 전통이 있다. 즉, 간부들은 최고지도자에게 편지를 쓰거나 건의를 하고 심지어 비판까지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시진핑이 취임한지 얼마 되지 않아 이런 것을 하려고 했던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사례를 보고 '반면교훈'(反面敎訓)을 얻었다. 2017년경 중국인민해방군 장군이자 전 국가주석 리셴넨(李先念)의 사위인 류야저우(劉亞洲)가 시진핑에게 편지를 써 신장정책을 수정하고 위구르 소수민족의 감금을 중단할 것을 건의했다. 그는 시진핑의 정책에 대해 더 이상 논의하지 말라고 경고를 받았다. 시진핑은 다른 사람들의 건의를 받아들이길 거부함으로써 '자기수정'을 위한 중요한 수단 하나를 없애버렸다.

왜 시진핑은 그의 전임자들과 사뭇 다르게 다른 사람의 제안을 거부하는가? 나는 시진핑이 가지고 있는 열등감 콤플렉스가 원인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다른 중국공산당 고위급 지도자들과 비교할 때, 시진핑은 자신의 교육수준이 매우 낮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칭화대학에서 화공학을 공부했지만 시진핑은 이른바 "공농병"(工農兵) 학생이었다. 공농병이란 1970년대에 정치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계급 출신으로 학업성적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대학에 입학한 학생이다. 그에 비해 장쩌민과 후진타오는 모두 경쟁이 치열한 시험을 통해 대학에 입학했다. 2002년 시진핑이 성급 간부로 있을 때, 그는 칭화대학에서 마르크스주의 이론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지만 영국 기자 마이클 셰리던(Michael Sheridan)이 밝혀낸 바와 같이, 시진핑의 논문은 표절이 의심되는 부분들로 점철돼 있다.

관료조직에서 엘리트층의 분노가 아래로 퍼지고 있다. 시진핑의 취임 초기에 그가 권력 구조를 대대적으로 재편하면서 많은 관리들이 점점 불만과 실망을 느끼게 되었다. 하지만 그들의 저항은 수동적이고 무대응으로 표현되었다. 많은 지방간부들이 대거 병가를 내거나 혹은 다양한 핑계를 대고 시진핑의 반부패 운동을 지연시켰다.

2021년 말 중국공산당 중앙기율검사위원회는 그해 1월부터 10월까지 '시진핑과 중앙정부의 중요지시 이행정신 부실' 사건 24만 7천건을 조사하고 처리했다고 발표했다. 상하이가 봉쇄되는 동안 저항은 더욱 공개적이 되었다. SNS에서 지방관리들은 공개적으로 '제로 코로나' 정책을 비판했다. 금년 4월 상하이의 산린젠(三林鎭) 주민위원회 위원들이 단체로 사임하면서 공개 서한을 통해 24일 동안 사무실에 갇혀 가족을 만날 수 없었다고 불평했다.

특히 시진핑을 불안하게 만드는 것은 엘리트들의 불만이 대중에게 확산되고 있다는 것이다. 권위주의 국가에서 여론을 정확히 가늠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시진핑의 엄격한 '제로 코로나' 조치로 대다수 중국인들이 시진핑에 대한 호감을 버리게 될 가능성이 있다. 일찍이 2020년 2월, 부동산 재벌 런즈창(任志强)은 이의를 제기했고 시진핑을 전염병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는 "광대"라고 불렀다. (그는 하루동안 진행된 재판을 통해 징역 18년형에 처해졌다.) 중국 소셜미디어에는 일반인들이 시진핑에게 '제로 코로나' 정책을 끝내달라고 간청하는 영상들이 넘쳐나고 있다. 금년 5월 '상하이 자구자치위원회'(上海自救自治委員會)라고 자칭하는 단체가 "노예가 되지 말라 - 자구하라"는 제목의 선언문을 온라인상에 발표했다. 이 문서는 상하이시 주민들에게 도시봉쇄에 맞서 싸우고 자치기구를 구성하여 서로 도울 것을 호소했다. SNS에서 일부 중국인들은 시진핑이 계속 권좌에 머무르는 것을 막기 위해 가능한한 빨리 20차 당대회를 소집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코로나 대응책'일 것이라고 냉소하기도 했다.

시진핑이 '3연임'을 확정지은 후엔 어떻게 될까? 그의 야심은 더욱 높은 곳으로 올라갈 것이다. 민간기업들을 억제하면서 경제를 진흥하려는 자신의 노력이 실패할 경우, 시진핑은 자신의 중앙집권적 경제정책을 몇 갑절 더 강화할 것이다. 시진핑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잠재적인 경쟁자를 선제적으로 없애고 사회적 통제를 강화하여 중국을 북한처럼 만들 것이다. 시진핑은 심지어 세번째 임기 이후에도 계속 권력을 잡으려 할 것이다. 간이 커진 시진핑은 남중국해 분쟁지역의 군사화를 가속화하고 대만을 무력으로 통일하려 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시진핑이 끊임없이 중국의 지배적 지위를 추구함에 따라 중국은 세계로부터 더욱 고립될 것이다.

하지만 위와 같은 모든 조치들로 당내의 불만이 마술처럼 갑자기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연임하더라도 중국공산당 내부에서 시진핑의 권력확대와 개인숭배에 대한 반대 목소리를 줄일 수는 없고, 또한 민중의 마음 속에 매일같이 자라나는 시진핑의 합법성 문제를 해결할 수도 없을 것이다. 사실 시진핑이 세번째 임기내에 하려고 할 조치들은 전쟁 위험, 사회 혼란, 경제 위기를 가중시켜 기존의 불만을 더욱 심화시킬 가능성이 매우 높다. 아무리 중국이라도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무력과 협박 이상의 것이 필요한데, 바로 실질적 업적이다. 마오쩌둥과 덩샤오핑은 모두 업적으로 권위를 얻었다. 마오쩌둥은 국민당을 물리치고 중국을 해방시켰고, 덩샤오핑은 중국을 개방하고 경제번영의 문을 열었다. 이에 비해 시진핑은 칭송할만한 성과도 없고 그만큼 과오가 용인될 여지도 없다.

내가 보기에 중국이 진로를 바꿀 유일한 방법은 가장 무섭고 치명적인 방법이다. 즉, 전쟁에서 굴욕적으로 패배하는 것이다. 만약 시진핑이 그의 첫번째 표적인 대만을 공격한다면, 전쟁은 계획대로 진행되지 않을 것이고 대만은 미국의 도움으로 침략에 저항하고 중국 대륙에 심각한 피해를 줄 수 있을 것이다. 그 상황에서 중국 엘리트와 민중은 시진핑을 버릴 것이며 이는 시진핑 개인의 몰락을 위한 길을 열 뿐만 아니라 심지어 중국공산당의 몰락을 위한 길을 열 수도 있다. 역사적 선례를 거슬러 올라가면, 18세기 건륭제는 중앙아시아, 미얀마, 베트남으로 제국의 영토를 확장하는데 실패했고 19세기에 와서 청일전쟁에서 참패했던 것이 청조(淸朝) 몰락의 토대를 마련하고 장기적인 정치적 혼란을 가져왔다. 황제는 영원하지 않다.



차이샤(蔡霞)는 중국 출신의 정치학자로 중국공산당 중앙당교(中央黨校) 교수로 15년 간 재직했다. 자본가의 중국공산당 가입을 허용한 장쩌민 전 중국 주석의 삼개대표사상의 초안 작성을 돕는 등 자유주의 성향이 강했으며 시진핑 집권 이후 시진핑을 비판했다가 2020년 중국공산당에서 제명당했다. 2019년부터 미국으로 망명해 거주하고 있다.





이 글은 국제시사·문예 버티컬 PADO의 '시진핑 리스크'를 요약한 것입니다. PADO는 통찰과 깊이가 담긴 롱리드(long read) 스토리와 문예 작품으로 우리 사회의 창조적 기풍을 자극하고, 독자 여러분이 급변하는 세상의 파도에 올라타도록 돕는 작은 선물이 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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