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P 스페셜
"젊잔애, 해뜰날 온다"…귀엽다고 난리난 '할매 손글씨'[남기자의 체헐리즘]
"그림 그리는 수요일이 최고 행복하다"는 '평균 82세' 여섯 어르신들, 폐지 줍던 이들의 즐거운 일자리…삐뚤빼뚤 그림·글씨 문구에 입혀 판매하는 '신이어마켙', 심현보 대표 "폐지 줍는 친할머니 안타까워, 인식 바꾸기 위해 시작"
남형도 기자
2023.03.21 09:31
편집자주|수습기자 때 휠체어를 타고 서울시내를 다녀 봤습니다. 불편한 세상이 처음 펼쳐졌습니다. 직접 체험해 깨닫고 알리는 기획 기사를 써보기로 했습니다. 이름은 '체헐리즘' 입니다. 체험과 저널리즘(journalism)을 합친 말입니다. 사서 고생하는 맘으로 현장 곳곳을 누비겠습니다. 깊숙한 이면을 알리고, 그늘에 따뜻한 관심을 불어넣겠습니다.


"어쩌라고! 아주 나 골려 먹는 재미로 회사 다니지?"
직원 다솜 씨의 장난에 강옥자 할머니(78)가 발끈했다. 한바탕 웃음이 터졌다. 옥자 할머니가 그리시던 건 '춤추는 선인장'. 그도 그럴만했다. 숨소리도 안 들릴 만큼 몰입해서 그리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봤기에. "나머지 공부하러 오셔서 그리셔야겠네?"하고 심현보 대표(32)가 장난을 더 보태었다. 이에 저마다의 키읔 소리가 또 공간을 가득 메웠다.
강 할머니가 검은 사인펜을 꺼내 들었다. 화룡점정. 선인장의 눈을 동그랗게, 서둘러 그려 넣었다. 아파 보인다던 선인장 그림에 생기가 돌았다. 그렇다. 할머니는 다 계획이 있었던 거였다. "눈도 그리구…요렇게 그려놓으면 되지!" 구시렁거리며 완성하는 강 할머니 모습에, 심 대표가 얼른 칭찬을 건넸다. "와, 눈이 없어서 그랬네요. 바로 달라지네!" 이미 삐진 할머니가 말했다. "저쪽으로 가!"


폐지 줍는 친할머니 속상해 만든 브랜드…'신이어마켙'

"친할머니가 폐지를 수거하시는 게 보였어요. 주변 친구분들도 주우셔야 했고요. 사회 조명을 못 받고 기피하는 일이잖아요. 그러다 보니 당신들께서 사회 구성원이란 생각을 못 하시더라고요."
해결하고 싶었다. 인식을 바꾸고 싶었다. 그래서 심 대표는 2017년에 사회적 기업을 만들었다. 이름은 '아립앤위립'이라 정했다. 나를 세우고 우릴 세운다는 뜻이다. 어르신들이 오롯이 섰으면 하는 바람이 담겼다.

만물상 같은 '마켙'에서, 어르신들 이야기가 있는 제품과 콘텐츠를 만들겠단 선한 바람이 담겼다. 어르신들이 그림과 글씨를 쓰면, 그걸 노트·펜·스티커·연필·달력 등에 디자인으로 입혀 판매하는 거다.
피자를 '파자'로…삐뚤빼뚤 어르신 개성이 외려 '경쟁력'

"처음에 제가 그랬지요. '대표님, 아유 이런 걸 누가 사요? 이런 걸 왜 사요?' 그렇게요."
할머니가 그린 서툰 그림, 삐뚤빼뚤한 글씨. 그걸 입힌 문구 제품이 무슨 경쟁력이겠냐는 물음이었다. 그렇지 않았다. 어르신들이 그리는 그림은 묘한 매력이 있었다. 솔직히 외람되지만 귀여웠다.

"잘하셨어요, 말엽 어르신. 피자라고 써보실까요?"(심 대표)
"피자! (실제로는 '파자'라고 썼다)"(말엽 할머니)
"오케이, 파자~!"(심 대표)
"하하하하하, 아주 좋아."(말엽 할머니)
맞춤법이 틀리기도 하고, 글자를 빼먹기도 한다. 심 대표는 그런 걸 가능하면 고치지 않고 다 살린다. 이유를 물으니 그는 "이분들이 이렇게 맞춤법을, 평생을 살아오셨잖아요. 그대로 쓰는 게 저는 어르신들에 대한 존중이라 생각했다"고 답했다. 그 개성에 대한 존중이 외려 경쟁력이다. 예쁘고 멋진 디자인은 많아도, 할머님만의 독특한 디자인은 없으니까.

나이의 좋은 점으로, 서로를 채워서

노년의 '느림'은 문제 되지 않았다. 할머니들이 그림 그릴 때, 승아 씨와 다솜 씨, 그리고 심 대표가 촘촘히 도와서였다. 글자가 하나 빠지셨다고, 이거 한 다음엔 꽃 그림을 그려달라고, 이 색을 칠하는 게 좋겠다고. 미음, 네모, 짝대기 등의 쉬운 말들로 할머니들이 그저 잘 따라오도록 함께했다. 그리 완성해갔다.
다 그린 걸 본 할머니들은 뿌듯해했다. 완성된 피자 그림을 보며, 김말엽 할머니께 "와, 이거 누구 그림이에요?"라고 물었다. 김 할머니는 부끄러워하며 "모르것~어요"하고 하하하 웃었다. 79세 김화자 할머니는 연인과 하트 그림을 다 그린 뒤 "이거 누가 그렸는가, 잘 그렸네. 하하"하며 미소지었다. 천진난만하게 좋아하던 모습이 왜 그리 좋던지.

고민 : "인생이 너무 힘들어요. 졸업하는 게 왜 이렇게 어려울까요?"
신이어 처방 : "원래 인생은 그렇단다. 사회 나오면 그보다 더 힘들다, 힘내라. 할머니는 한글도 잘 모른다(스마일)."
출근하느라 아침밥도 못 챙겨 먹는 대표와 직원 둘을 위해, 강옥자 할머니는 자꾸만 간식을 싸 온다. 심 대표는 "저희 아침밥 해주느라 월급을 다 쓰시는 것 같다. 떡볶이, 누룽지, 김밥, 전 등 손주 같은 마음에 꼭 챙겨 주신다"고 했다. 절대 하지 말라고 해도. 아침 7시 30분에 할머니표 닭똥집 튀김을 먹는 대단한 회사가 또 있을까. 강 할머니는 "우리 애들도 아침 일찍 일 가면 뭐라도 먹여 보냈었다"고 했다.
'수요일'이 빨간날이면 슬퍼한다고

그날 함께하며 본 어르신들의 모습이 진하다. 그 시간은 일자리 이상이었다. 진정 잘해내고픈 열정이었다. 하옥례 할머니(82)는 글씨가 한쪽으로 올라갔다며 내내 맘에 안 들어 하더니, 새 종이를 받아 다시 쓰겠다고 했다. 그리고는 한 자 한 자, 또박또박 집중해 신중히 채워갔다. 마케터인 김다솜 씨는 "어르신들이 시간 나면 그림 연습을 하고, 친구한테 선물도 한다"고 했다.
그러니, 일하러 나오는 수요일은 더없이 특별한 날이 됐다. 되게 소중하게 생각하는 거다. 빨간 날에 걸려 쉬게 되면 슬퍼한다고. 빨간 날만 손꼽아 기다리는 대다수 직장인은 짐작할 수 있을 거다. 그 무렵의 일자리는 어쩌면 지금과는 달라질 수 있겠다는 걸.

"너어무 좋지요, 진짜로. 여기 온다고 하면 벌써 재밌어요. 오늘 아침도 새벽 4시에 일어났어요. 놀이터 한 바퀴 돌고 그랬지요. 이렇게 다니며 그림도 하고, 친구들도 많고, 기분이 엄청 좋아요."(함복순 할머니)
"처음이잖아요, 이렇게 하는 게. 그래서 출세했다고 그래요. 내가 그림 그리는 거 다닌다고 하면요. 진짜 늙지 말고 조금 더 이렇게 있었으면 좋겠어요."(김명심 할머니)

"옛날엔 학교도 많이 안 다녔잖아요. 원래 그림을 좋아했는데 핼 시간이 없었어요. 해는 건 뭐든지 해보고 싶었었는데요. 아들 키우고, 손주 키우고 하느라 제 삶이 없었어요. 그런데 이게 너무 좋은 거예요. 힘든 것도 다 잊어버리고요."(강옥자 할머니)
73명이 함께 생각해 본, '어르신이 잘할 수 있는 일'

심 대표는 "다양한 노인 일자리를 만드는 고민을 하고 있다"고 했다. 그림을 그리고 제품을 포장하는 건, 어르신이 관여하는 정도가 낮다고, 관여도가 더 높은 일자릴 찾겠다고 했다. 그는 "저희 아버지도 5년 후면 65세가 된다. 우리 부모님이 일할 수 있는 회사를 만들면 좋겠단 얘길 한다"고 했다. 디자인 담당 직원 승아 씨도 "처음엔 어르신이 귀엽단 생각이었는데, 생각보다 더 많은 걸 할 수 있단 걸 알게 됐다. 그걸 보여주고 싶다"고 했다.

전래동화와 같이 아주아주 먼 옛날 경험담을 얘기해주는 거요.
취업준비생 상담이요. "내가 OO년 살아봤는데" 같은 연륜이 묻어나는 조언이 가끔 너무 필요해요.
구수한 율무차, 달달한 유자차 등을 마실 수 있는 찻집이 있으면 좋을 것 같아요.
정서적인 육아 보조요. 이야기로 심적인 안정을 찾아주는 역할이 필요해요.
신호 위반이나 무단 횡단을 사진, 영상 찍어 신고해주는 거요.
지혜를 나누는 일이요. 인간의 지식은 세월을 초월하기 어렵다고 봅니다.
위로요. 저는 어르신들 해주시는 위로와 조언이 좋더라고요.
유기 고양이 돌보기, 공공 급식소 사료와 물을 관리하는 일이요.
맛 감별은 어르신들이 정말 최고이실 듯합니다.
어떤 분야든 아시는 것들을 전달하는 거요. 저희 아빠는 음악을 좋아하셔서, 어렸을 때부터 음악 관련 얘기는 아빠한테서 배웠어요.
동네 도슨트요. 산 증인이시니까요.
레시피요. 아무래도 옛날부터 있는 요리는 어르신들이 참 잘하세요.
어린이들에게 동화책 읽어주기요. 다정하고 재밌게 읽어주셔서 아이가 행복해했습니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편을 들어주시는 거요.
천천히 기다려주시는 일이요. 노견과 속도를 맞춰 천천히 걸어가시는 모습이 참 좋았어요.
살아온 환경과 능력이 다양하니, 그 재능을 발굴시켜주는 프로그램이 있다면 할 일도 무궁무진하겠지요.
어르신을 위하여 아이디어를 떠올려봤으나, 실은 모두를 위한 것일 거라고.
누구나 빠짐없이, 어르신이라 불리는 나이가 될 테니 말이다.

그림을 그릴 때였다. 자리마다 할머니들 이름표가 다 붙어 있었다. 그리고 심 대표와 직원들은 매번 어르신 이름을 불렀다. "화자 어르신", "복순 어르신", "말엽 어르신" 이렇게. 이유를 물었더니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자기 이름이 불리는 것도 오랜만이신 거더라고요. 그런 게 잘 없었고, '누구 엄마'나 '어디 댁' 이렇게 불렸으니까요. 그래서 일부러 더 이름을 불러드리면 좋겠다고, 저희도 어르신들과 함께 지내며 배웠지요."
할머니들과 오래 함께 가기 위한, 그런 섬세한 고민들이 참 좋았다. 4월 초엔 꽃놀이 가서 사진 찍을테니 오후 시간을 비워두란 향기로운 공지도, '할머니' 단어를 쓰다 '니'를 빠뜨려 죄송하단 할머니에게 "에이, 그걸 안 빼먹으면 20대예요, 그렇지 않아요"라고 대수롭지 않게 안심시켰던 모습도.

<저작권자 © ‘돈이 보이는 리얼타임 뉴스’ 머니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